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움노 절멸수용소 (문단 편집) == 운영 역사 == [[파일:Nazi 1944 Mar..png|width=600]] ↑ 1944년 3월 제 3제국. 동쪽의 노란색 영토가 바르테란트 제국대관구,[* 제 3제국의 최상위 행정구역은 대관구(Gau)와 제국 대관구(Reichsgau)였는데, 대관구는 기존의 독일 영토에 세웠고 제국대관구는 새로 합병한 오스트리아, 주테텐란트, 독일제국 시절 독일 영토였던 비엘코폴스카 일대, 포메렐리아 일대(그단스크 주변)에 세웠다. 보헤미아, 모라바 지역은 보호령으로 남겼다.] 영역 내 색칠되지 않은 지역은 폴란드 총독부다. [[파일:Arthur Greiser.jpg|width=300]] ↑ 바르테란트 대관구지도자(Gauleiter) 및 [[슈츠슈타펠|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아르투어 그라이저]](Arthur Greiser). 헤움노 수용소 건설지시 등 홀로코스트에 깊게 관여했다는 점과 함께 다수의 전쟁포로를 처형하고 현지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했다는 혐의를 받아 1946년 폴란드 최고국가재판소(Supreme National Tribunal)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직후부터 나치는 유대인 학살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이 폴란드 이동의 새로 점령한 점령지를 돌아다니며 대규모 총살을 통해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그동안 게토에 수용되거나 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지던 기존 점령지의 유대인들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바르테란트 대관구의 통치자였던 아르투어 그라이저(Arthur Greiser)는 바르테란트가 '나치 인종계획의 훈련장'이 되어야 한다며 나치의 대관구 지휘자들 중에서 유대인 절멸계획에 가장 먼저 발벗고 나섰고, 1941년 10월 경, 자신의 통치하에 있던 약 38만의 유대인 중 10만명을 노동 부적합 인원으로 보고 이들을 학살하게 해달라고 하인리히 힘러에게 건의했다. 이때, 희생자들을 직접 찾아가 학살하는 것이 아닌 희생자들을 하나의 장소에 불러 모은 뒤 학살과 시체 처리를 동시에 수행하는 절멸수용소의 아이디어가 제시되었고 이에 따라 나치 최초의 절멸수용소 건설이 계획되었다. [[파일:Holocaust Poland.png|width=600]] ↑ 폴란드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확대 가능. 바르테란트 관구와 헤움노 절멸수용소를 확인하기 바란다. 범례로 표시되지 않은 하얀 두개골은 대규모 총살이 일어난 곳 중 몇 곳을 표시한 것이다. 1941년 11월부터 수용소 부지 물색이 시작되었고 대도시 우치를 포함해 바르테란트 관구에서 특히 유대인이 많은 지역 한 가운데 있던 헤움노 나드 네렘 마을을 수용소 부지로 잡았다. 수용소 구성은 T-4프로그램에서 바르테란트 지역의 장애인 학살을 지휘했던 헤르베르트 랑에(Herbert Lange)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T-4프로그램 당시 가스바겐[* 영어로는 가스 밴. 트럭을 개조해 짐칸을 밀폐된 공간으로 만들고 이 공간으로 트럭의 배기가스가 흘러들어가도록 호스를 연결하고 트럭의 엔진을 공회전시켰다. 짐칸에 있던 유대인들은 약 20분 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을 이용한 대량학살을 떠올리며 새로 지어질 절멸수용소에서 가스바겐으로 학살을 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는 베를린에 요청하여 T-4프로그램 당시 쓰이던 가스바겐 중 세대를 얻어냈고, 헤움노 마을의 작은 성 하나를 개조해 위장된 장원으로 꾸미고 가스바겐의 '승강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장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 한가운데에 시체 매장터(숲 캠프)를 만들고 이곳에 유대인 인부를 상주하게 했다. 첫 이송은 1941년 12월 8일부터 주변의 수많은 작은 마을에서 이루어졌다. 이듬해 1월 중순까지 한달동안 약 8000명의 유대인과 집시가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1942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직할령 최대의 게토인 우치 게토[* 독일 점령지 전체에서 최대의 게토는 약 42만명이 수용된 바르샤바 게토였고 우치 게토는 약 22만명이 수용되어 두번째로 큰 게토였다. 하지만 바르샤바 게토는 폴란드 총독부 통치하에 있었다.]에서 이송이 시작되었다. 우치 게토에서 절멸수용소 이송으로 줄어든 인구는 독일과 체코 지역에서 보내진 유대인들로 다시 채워졌다. 1943년 3월 아르투르 그라이저는 바르테란트를 '유대인으로부터 자유로운 구역(Judenfrei)'으로 선포했다. 이때까지 헤움노에서 학살된 유대인, 집시 수는 약 15만명 정도로 추측되는데, 바르테란트의 나머지 유대인들은 우치 게토에 마지막까지 남은 유대인들을 제외하고 모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보내졌다. 필요한 노동력을 제외하고 바르테란트의 유대인이 모두 학살된 뒤였기에 1943년 4월 나치는 수용소 폐쇄를 결정한다.[* 한편 총독부의 라인하르트 작전은 계속 진행중이었다. 헤움노는 라인하르트 작전과는 별개의 시설이었다.] SS는 '성 캠프'를 폭파했고 나머지 장원에 있던 주요 건물들도 철거해 증거를 인멸했다. 그리고 [[나치군]]이 [[카틴 학살]]의 현장을 발견한 직후였기 때문에 헤움노에서도 다른 절멸수용소와 마찬가지로 매장된 시신을 다시 꺼내어 모두 소각했다. 불태워진 재는 근처의 바르타 강[* 바르테란트의 어원이다.]에 버려졌다. 1944년 우치 게토에는 마지막 유대인 노동력으로서 약 7만의 유대인이 남아있었는데, 나치는 1944년 6월 남은 유대인들마저 모두 처형하기로 하고 45,000명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나머지 25,000명은 이미 폐쇄된 헤움노 수용소를 다시 가동시킨 뒤 이송했다. 이미 성 캠프의 주요 시설을 파기한 뒤였기에 학살의 주요 과정은 모두 시체를 처리하던 '숲 캠프'에서 일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